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남 사건 (문단 편집) === 일본군의 최후통첩과 최후의 교섭 === 5월 7일 오후 4시, 후쿠다 사단장은 중화민국 임시 외교대표 조세선에게 5개 조항의 요구를 전달하고 12시간 내에 화답할 것을 요구했다. 요구는 다음과 같다. ||1. 소요 및 폭행행위에 관계한 고급 지휘관에 대한 준엄한 처벌 2. 일본군의 입회 아래 일본군에 대항한 군대의 무장해제 3. 국민혁명군이 지배하는 지역에서의 모든 반일 행위, 선전의 엄금 4. 지난과 철로 주변 20리 내외의 모든 국민혁명군 철수 5. 이상의 조처에 대한 감시를 위해 병영을 일본군에 개방할 것.|| 이러한 일본군의 단호한 태도는 적어도 5월 4일과 5일 양일에 걸쳐 열린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었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참모본부도 강력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었다. 다만 원래 계획에선 장제스와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지난에 묶어두고 교섭하려 했으나 장제스가 5월 6일 지난을 떠나버림으로 최후통첩으로 대응이 더욱 강경해진 것이었다. 중국 측은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면서 장제스의 허가를 받기 위해 회답 시간을 연기해줄 것을 청했으나 일본군은 막무가내였다. 장제스는 5월 7일 저녁 후쿠다의 요구를 접하고 6개 항에 걸친 회답을 작성하여 슝스후이로 하여금 5월 8일 오전 후쿠다와 면담하게 했다. 장제스의 6개조 회답은 다음과 같다. ||1. 본 총사령의 명령에 불복하여 중일 쌍방의 오해를 피하지 못한 본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조사하여 법률에 따라 처분하겠지만 당시 일본군에서도 마찬가지로 행동한 자에 대해서 처분해야 한다. 2. 중일양국의 우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본 혁명군이 지배하는 지역 내에서는 반일 선전을 금지하는 명령을 조속히 내리고 분명하게 단속할 것이다. 3. 철로 주변 20리 이내의 각군에게 북벌에 출발하라고 이미 명령하였고 지난 등지에는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당한 군대를 주둔케 한다. 4. 철로의 역은 교통의 요충이므로 군대를 파견하여 지킨다. 5. 병영의 부대는 이미 전방 작전에 가도록하고 주둔하지 못하도록 이미 명령하였다. 6. 일본군에 의하여 억류된 관병과 무기를 속히 돌려달라.|| 일부 조건이 있긴 하지만 결국 전체적인 모양새론 일본군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라 중국 입장에선 상당히 굴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장제스는 9일 오전 지난 성내의 일부 부대만 제외하고 이연년, 소종철 부대를 전부 철수시켰고 9일 오후까지 완전히 철수되었다. 하지만 후쿠다는 장제스의 6개조 회답을 묵살하고 최후통첩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을 요구하며 8일 오전 4시까지 정식회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부득불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통보를 보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